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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
by 윤준호

1990s 1999.10. 쌈지사운드 페스티벌과 트라이포트 - 한국 페스티벌 문화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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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1-09작성자  by  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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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너무 흥분해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게 되는구나... 우리나라도 이게 되는구나...” 하늘을 가득 채운 함성과 떼창! 관객들이 한목소리로 우리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 순간만큼은 글래스턴베리가 부럽지 않았다.

 

1999년 가을 어느 날,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의 강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제1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이하 쌈싸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사실상의 무료 공연이었지만,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록 페스티벌의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같은 해 여름에 있었던 ‘인천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의 저주‘와 비교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락페는 쌈싸페‘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 명성은 나중에 펜타포트나 지산락페가 생기기 전까지 유지하게 된다. 델리스파이스는 첫 회 때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서 총 4번을 참여하였고, 나의 경우 2007년에 오메가쓰리로 무대에 선 적도 있다.

 

세기말이었던 그때 즈음,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면서 PC통신 시대는 명실공히 저물어갔다. 동네마다 생긴 PC방은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를 즐기려는 젊은이로 그득했다. 냅스터와 소리바다가 유행하기 직전, 음반시장은 정점을 찍었다. 아이돌을 비롯한 주류 음악계에 대한 반발감이 최고조이던 홍대 앞에도 시장의 호황은 영향을 끼쳤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 밴드라도 어느 정도 입소문만 타면 앨범 3000장을 기본으로 팔 수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록페스티벌 하면 레딩, 롤라팔루자, 글래스턴베리 등 외국의 영상을 통해서 본 게 고작이었고, ’과연 이런 대형 무대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하며 부러움 가득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쌈지’라는 의류회사에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무대였다. 쌈지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미술과 음악 전반에 걸쳐 비주류 문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기업이었다. 아무리 그때 우리나라 밴드 음악이 중흥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시장성만 보고 티켓판매로 수익을 올리려고 했다면 기획 자체가 불가능했을 무대였다. 경기장을 제외하면 그 무렵 가장 큰 야외 행사장이던 연세대 노천극장에 ‘무명 음악인’들만으로 채우는 모험이었다. 당시 쌈지 천호균 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실험적이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신예 음악가를 발굴하고 대중에게 다양하면서도 신선한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죠.”

 

출연진을 ‘숨은 고수’와 ‘무림 고수’로 나누어 무대 자체를 따로 준비한 기획도 신선했다. 당시 ‘챠우챠우’와 ‘달려라 자전거’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델리스파이스는 무림 고수의 자격으로 좋은 시간대를 배정받았다. 어떤 밴드가 써브 스테이지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우리가 악기 세팅을 위해 무대로 오르자 관객들은 일제히 메인 무대를 항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연주 중이던 숨은 고수가 바로 ‘넬’이었다. 넬은 그때 한창 인디 데뷔를 앞두고 레코딩 중이었데 내가 그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아 진행 중이었다. 그때 메인 스테이지에 오른 델리스파이스가 너무 부러웠다며 자신들이 훗날 우리보다 더 유명해질 목표가 생겼다고 호언장담하던 넬 멤버들... 어쩌면 그때 쌈싸페라는 무대가 그들에게 강렬한 목표의식을 심어 준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밖에도 크라잉넛, 어어부프로젝트, 닥터코어911 등이 참여한 첫 회의 성공에 힘입어 점차 라인업의 범위를 넓혀 가는데, 자우림, 언니네이발관, 롤러코스터 같은 밴드부터 이승환, 이상은, 리쌍, 싸이에 이르는 메이저 가수들까지 기꺼이 서고 싶은 무대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라인업으로 보자면 몇 달 앞선 여름에 열렸으나 불발로 그친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 훨씬 화려했다. 딥 퍼플부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드림 씨어터, 프로디지 등 해외 출연진을 필두로 이름 좀 날린다는 국내밴드도 총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트라이포트를 기다리며 품었던 한국 락음악 팬들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고 나를 포함한 주변의 동료밴드들 역시 저런 무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드스탁의 드넓은 야외무대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인천 송도의 어느 진흙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공연기획사의 경험 부족과 미숙한 진행, 그리고 날씨... 몇 십 년만의 대폭우가 하필이면 그때 내렸다. 끝없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텐트촌은 흙탕물에 잠기고 우천을 전혀 대비하지 않은 무대는 물바다로 변했다. 결국 딥 퍼플과 드림 시어터 등 몇 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연을 취소했다. 출연진들 중 ‘누구는 인천까지 갔다가 그대로 돌아왔네’, ‘누구는 경인고속도로 중간에 연락받고 차를 돌렸네’, 등등 소식이 들려왔다. 델리스파이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출발하자마자 이 비보를 듣고 씁쓸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하늘도 저주한 한국의 락음악”이라는 표현이 생긴 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적자만 13억 원에 달할 정도로 쓰리고 아픈 경험이었지만 트라이포트의 실패는 후일 2006년에 시작된 인천 펜타포트록페스티벌의 밑거름이 되었다. “제대로 된 규모와 라인업을 갖춘 한국 락페스티벌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일구어 낸 펜타포트는 성공적으로 여름 시장에 안착하였고, 이어지는 지산 락페스티벌 등 한국 여름 록페스티벌의 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이 된다.

 

우리에게 멋진 음악 페스티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공연 한번 잘 봤네’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음악계 전체가 성장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기획, 무대, 장비, 음향, 조명, 악기, 영상, 전문 스태프 등등의 분야가 함께 성숙해지고, 나아가서 다음 세대 뮤지션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멋진 무대를 접하고 난 후 ‘나도 저런 밴드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자극을 받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비록 미숙함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런 공연시장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시절의 트라이포트와 쌈싸페... 역사적 의미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윤준호 (델리스파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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