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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by 우정호

70년대 청년문화 히로인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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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4-16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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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청년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1970년대의 길목. 음악과 노래를 사랑한 이지적인 청년 양희은이 처음부터 가수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동 YWCA의 청년 공간 ‘청개구리’에서 목소리를 낸 작은 시작은, 그녀를 대한민국 포크 문화의 프론트 우먼으로 이끌게 했다. 이후, 변화무쌍한 시대를 목도해온 그녀의 연륜은 노래에 깊이 녹아, 김민기가 작곡한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통해 전 국민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했다. 

  

 

(아카이브 K는 양희은과 2020년 4월 인터뷰했다.)  

 

 

- 가수 데뷔 50주년을 넘기셨습니다. 긴 세월 동안 한 길을 걸어오신 소감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양희은 : 소감은 별로 뭐 그렇게... 왜냐하면 50년 세월이 갑자기 무슨 쓰나미처럼 닥친 게 아니라요. 그냥 하루하루, 하루하루 일상을 살다가 그게 쌓여서 50년이 됐기 때문에 ‘와우 50년!’ 이런 실감은 안 나고요. 뒤돌아보면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세월은 이렇게 갔구나, 그런 생각 들어요. 

 

-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셨나요?

 

양희은 : 아니요. 원래는 두 가지 꿈이 있었어요. 방송 프로듀서하고 또 하나는 역사 선생님. 

 

- 아, 역사를 좋아하셨어요? 

 

양희은 : 전공했어요. 

 

-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신 건 언제부터였나요?

 

양희은 : 노래는 미취학 아동 때부터요. 한 3살, 4살 때부터.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노래시키기를 좋아하셔서 하여튼 집에 손님이 오셨다 하면 노래를 무조건 시키고 저는 그만하라고 그럴 때까지 불러야 됐어요. 동생이랑 두 살 터울인데, 둘이 나란히 세워놓고 노래시키는 걸 참 좋아하셨어요. 그게 저희 집의 손님 접대였어요. (웃음) 딸 둘이 노래하는 거. 

 

- 어린 시절부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노래를 잘하는구나’하고 느낀 적이 있었나요?

 

양희은 : 없었어요. 제가 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으니까. 그걸 만약에 라디오 방송으로 나가게 녹음해 놓고 들었으면 ‘어? 내 목소리가 이런가?’ 할 테지만 어린 날에는 뭐 노래를 내가 남달리 잘한다, 이런 것보다 어쨌든 소리가 컸어요. 소리통이. 그래서 뭐 애국가 선창, 제창 이런 거 항상 뽑혀서 했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 학창 시절에도 이미 뽑혀서 노래하셨던 거군요.

 

양희은 : 늘. 늘 뽑혔어요. 그러니까 초등학교 한 4, 5, 6학년 내내, 그다음에 중고등학교 6년 내내. 그런 편이었죠. 

 

- 그런데 스스로 잘한다고 자각하지 못하셨나요? 알 게 될 것 같은데. (웃음) 

 

양희은 :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목청은 컸어요. (웃음) 어머니가 잘하셨어요. 우리 어머니 노래하시는 걸 들으면서 제가 ‘참 노래 좋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것과는 좀 다르게 좋다’ 그런 생각은 했었어요. 

 

- 그러면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게 된 건 언제쯤부터였나요?

 

양희은 : 본격적이라는 말보다 교복의 울타리 밖에서라고 할까요. 우리는 교복 시대니까요. 70년 여름쯤에 서울 YWCA의 ‘청개구리’라는 데가 제 첫 무대였어요. 제가 서울 YWCA에서 ‘Y틴(청소년운동)’ 활동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 건물의 선생님들, 우리는 ‘강사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분들과 익히 얼굴을 아는 사이였죠. 선생님들이 ‘명동에 청소년들이 많이 오가는데, 도대체가 명동에 청소년들이 가면 앉아있을 만한 곳이 없잖니.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하시면서 명동 YWCA 건물 안에 있는 식당을 개조했어요. 당시에는 카펫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군용 담요같이 빳빳한 그런 깔개를 쫙 깔고 앉는, 그러니까 좌식 다방을 만들어 주신 거예요. 

 

입장료는 100원이었는데 내면 1원을 거슬러 줘요. 그럼 돈을 낸 청소년들이 그 1원은 대부분 안 받고 유리병 속에 모금을 해요. 그걸 모아 좋은 일에 쓰신다 그랬는데, 그러니까 99원을 내는 셈이죠. 입장을 할 때 신발주머니를 받는데, 거기에 신발을 넣고 좌식 다방에 들어가서 다 털퍼덕 앉는 거예요. 그러면 한편에는 바둑판도 있고, 또 장기판도 있고, 그리고 한 뼘 정도 높이로 돋워진 무대도 그렇게 있고. 무대와 마주 보는 구석의 천장에는 셀로판지로 만든,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이렇게 수동으로 돌리는 조명이 있었어요.

 

그래서 Y틴 출신 여학생들이 워낙 많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오기도 하고. 왜, 대학생들은 뭐 누가 좀 알면 반나절이면 다 소문이 나잖아요.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제 꾸며진 게 하나도 없이 각자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면, 바둑 둘 사람은 또 두고, 그러면서 무대를 관전하고. 그런 게 소문이 나니까 방송국 음악 프로듀서들이 거기 와서 청년들이 하는 노래와 문화를 귀 기울여 듣기 시작했고.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에 섭외를 하기도 하고 그랬죠. 

 

- 당시 명동 YWCA 건물에 있는 ‘청개구리’에 처음 가신 계기도 알고 싶습니다.

 

양희은 : 제가 좀 까부느라고 공부를 안 해서 재수를 했는데, 학교에서는 제가 이제 좀 유명한 편이었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제 축 처져서 수그리고 있으니까 여고 동창들이 ‘야, 거기 한번 가 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 공간이 생경하지 않았던 게 여고시절 내내 드나들던 저희 특별활동 무대였기 때문에 가서 이제 앉아 있었죠. 

 

그렇게 친구들과 갔는데, 어떤 분위기였냐면, 누군가 무대에서 마이크도 없이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MC인 거였죠. 뭐 전유성 선배 같은 분이 판토마임을 하면 그걸 우리가 같이 보는 거고. 누구든지 순서도 없고 MC도 없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꾸려 나가지던 그런 무대였어요. 그래서 같이 친구들이 여럿이 갔는데 동창들이 ‘여기 우리 학교 때 노래 잘하는 양희은이라는 친구가 와 있으니까 한번 노래 좀 듣게 해 주세요’ 또 이렇게 쪽지를 보낸 거예요. 

 

- 그럼 처음에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신 건 아니었군요.

 

양희은 : (웃음) 아니요, 구경 갔어요, 구경. 노래를 해야 되겠다는 건 아니었고요. 아유, 재수생이었는데, 진짜. 코가 석자죠. 우울하고. 공부는 진도 별로 안 나가고. 그런 시절에 기분전환 삼아 따라간 거죠. 그리고 자주는 못 갔어요. 2학기 접어들면서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되는데 뭐 여러 가지로 공부가 되지는 않고. 그랬던 형편이었죠.

 

- 청개구리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듣고 가게 되신 건가요?

 

양희은 : 여고 동창 친구들이 대학생들이 모여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하고 뭐 재미 나대, 막 이러고. 그래서 갔었죠. 

 

- 대학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었다면, 거기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아마추어들이었던 건가요?

 

양희은 : 아마추어죠. 그러나 이미 방송에 데뷔한 분들도 계셨죠. 그리고 청개구리가 시작되면서 조금 있다가 그분들이 ‘오비스 캐빈’이나 이런 데서 일을 하셨어요. 무대를 가지게 됐고 월급을 타셨어요. 그러니까 대학생들이야 다 아마추어지만 거기 송창식 선배도 계시고 투코리안스도 계시고 그렇게 기성 무대에 서는 분들도 계셨어요.

 

- 그 공간에 또 어떤 분들이 그 공간에 오셨나요?

 

양희은 : 뭐 방의경 씨, 또 김광희 씨.... 한 분은 한 분은 서울음대고 한 분은 이대였는데. 뭐 음악 전공하신 김광희 씨도 계셨지만 방의경 씨는 또 기타 치면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셨어요. 선배 언니들이죠. 저보다 3년 위에. 

 

그 언니들도 계셨고, 뭐 아까 얘기했지만 전유성 씨도 계셨고. 또 임문일 씨라고 그 당시에 MC처럼 무대에서 진행을 잘 보던 그런 분도 계셨고. 또... 아, 어니언스. 어니언스가 결성되기 전에 멤버 두 분 중 한 사람인 이수영 씨도 계셨고. 또 박인희 씨도 계셨고, 그랬어요.

 

- 정말 많은 예술인들이 오갔던 공간이었군요.

 

양희은 : 그럼요. 많이들 드나드셨어요. 뭐 매일 똑같은 시간에 오는 건 아니고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뭐 일요일은 쉬셨나, 아마? 월 화 수 목 금 토. 학생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었죠. 그리고 이미 졸업한 지 몇 년 된 선배들도 계셨죠. 

 

- 청개구리 무대는 관객과 거리가 없다시피 한 만큼 소통도 활발한 분위기였을 것 같습니다.

 

양희은 : 그럼요. 마이크가 없고 숨소리가 다 들려요. 눈빛 다 보이고. 그래서 참 무서운 무대죠. 사실 나중에 이렇게 공연하면서 보면 그 무대가 제일 무서워요. 눈빛을 다 읽을 수 있으니까. 마음이 흩어지기도 하죠, 남의 눈빛을 보면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떤 때는 머리가 하얘지기도 하고 그렇죠. (웃음)

 

그래도 보통 비판보다는 칭찬 또는 감상평 그런 게 많았죠. 비평보다는 감상. 노랫말의 어디가 너무 예쁘다. 멜로디하고 똑 맞아떨어진다. 그다음에 말이 가서 붙는 게 너무 아름답다. 우리 말이 곱다는 걸 알겠다, 뭐 이러면서 격려를 많이 해 주셨어요. 

 

- 양희은 씨는 청개구리에 매일 가셨나요?

 

양희은 : 에이, 안 갔다니까요. 그날 한 번 가고, 예비고사 보고 나서 그리고 겨울에 갔어요. 그런데 너무 희한하게 제가 처음 그 무대에서 노래할 때 거기 기독교방송 PD 분이 와 계셔가지고 그렇게 노래를 녹음하자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나는 재수생 주제라 안 된다고, 저희 어머니도 또 그건 안 된다고 했는데. 너~무 너무. 한번만 와서 간단하게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한번 부르면 된다 그래가지고 음... 

 

그렇게 해서 서양 노래를 두서너 곡을 릴 테이프에다 취입을 했고, 취입이라고 볼 수 있죠. 방송국에서 한 거였는데. 그런데 어머, 그게 젊은이들이 많이 듣는 오후 시간대하고 밤 시간대에 전파를 타기 시작한 거예요. 70년도에...

 

- 반응은 어땠나요?

 

양희은 : 뭐 말도 못 했죠. 그러면서 제가 대학 합격하고 나서, 우리 서울 YWCA 학교 선생님, 그러니까 우리 학생부 담당 선생님들의 권유로 제가 거기서 콘서트를 했다니까요. 

 

- 청개구리에서요? 

 

양희은 : 네. 71년 2월에 했어요. 그런데 막 미어터져가지고 나중에 그 음악 방송 담당 프로듀서들이 못 들어오셔갖고 막 우리한테 역정도 내고 그랬어요. 그런데 뭐 역정을 내거나 말거나 그냥 나는 고등학교 때 우리 친구들 정도 모아서 그냥 노래하고 듣고 그러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밀려 터져가지고요. 그야말로 미어터졌어요. 

 

- 콘서트 레퍼토리가 있었을 텐데... 

 

양희은 : 제 동생 양희경이가 화음도 넣고, 그때 김민기 씨한테 제가 부탁을 해서 기타 반주를 도와주셨고요.

 

- 김민기 씨와는 전부터 알던 사이였나요?

 

양희은 : 지금은 제 친구의 남편이니까. 그런데 워낙 대학교 1학년 그때부터 아마 둘이 사귀는 걸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했어요. 워낙에 선남선녀들이라 인물이 뛰어나서. 

 

- 김민기 씨와는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들었습니다.

 

양희은 : 선배죠, 저의 1년 선배. 재동 국민학교 1년 선배. 그때부터 알고 지낸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 혼자 알고 있었던 건, 이제 기독교 방송에 <꿈과 음악 사이에>라는 심야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서 김민기 씨 ‘친구’라는 노래가 자주 나왔거든요.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듣고 너무.. 너무 충격이 커서, 목소리가 울림이 굉장히 컸어요. 그래 가지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내가 이제 친구들 앞에서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데 기타를 잘 못 치니까, 제가 기독교 방송에서 몇 개월 전에 이미 취입을 한 적이 있어서 그 연으로 부탁해서 김민기 씨를 만났어요. 그렇게 알게 돼가지고 제가 부탁하고 연습하고 그렇게 된 거죠. 

 

- 그러면 청개구리에서 김민기 씨도 공연을 했나요?

 

양희은 : 네. 김민기 씨 그룹이었던 도비두가. 피터 폴 앤 메리 노래를 참 잘 불렀어요. 기타가 워낙 현란했고, 기타 솜씨가, 두 분 화음이 너무 좋았고. 굉장히 좋아했어요. 제가 광팬이었죠. 

 

- 어떤 부분이 특히 좋았나요?

 

양희은 : 음성 톤이 달라요. 목소리 톤이 다르고. 어쨌든 우리랑 한 학년 차이밖에 안 났는데. 또래라고 할 수 있고 레퍼토리가 달랐죠. 기타 솜씨도 좀 달랐고. 느낌이 달랐어요, 느낌이. 

 

- 레퍼토리가 달랐다면 그 시절 김민기 씨는 창작곡 위주로 불렀기 때문인가요?

 

양희은 : 아니요. 피터 폴 앤 메리의 노래도 불렀다니까요. 그리고 이제 본인이 만든 노래도 부르고. 그게 아마 시작일 거예요. 송창식, 윤현주 선배분들께서는 번안곡을 많이 부르셨고. 그리고 그때쯤 뭔가 서양 노래를 많이 부르면서 ‘우리도 우리 얘기를 한번 해 보자’라는 움이 텄다고 할까요? 그렇게 해서 그 당시 청개구리에서 ‘나 이거 어저께 밤에 만든 노래인데 한번 들어 봐’ 이러고 이제 부르면 다들 웬만한 화음은 다 넣으니까 그 선율 이렇게 한 번 듣고 나면 화음이 쫙~ 퍼져요. 그러면 이제 ‘이야, 이 노래는 나보다는 네가 훨씬 낫겠다, 니 목소리로 듣는 게’ 그러면 그 노래를 그 사람한테 주는 거죠.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이 불러요. (웃음) 

 

그리고 그때는 뭐 저작권이나 이런 게 없을 때니까. 또 노래를 돈으로 환산해서 사고팔고 하던 때는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뭐 그렇게 기성 음악계의 흐름하고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보다는 ‘니가 부르는 게 더 낫다’ 그러면 받아서 부르고 그랬어요. 

 

- 돈 받고 곡을 쓰거나 가사를 써주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군요.

 

양희은 : 아유, 그런 건.. 70년, 71년에 그런 거는 있지도 않았죠. 있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의 기점에서 보면 안 돼요, 

 

- 번안곡 위주 레퍼토리에서 ‘우리 노래를 해보자’라는 얘기가 그때 생겨난 거군요.

 

양희은 : 그건 ‘이렇게 해 보자’ 이래서 시작된 게 아니라 그냥 한 사람, 두 사람이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거죠. 자기 얘기를 하다 보면 얘기에 멜로디가 얹혀서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 일종의 자작곡 발표의 장이 시작된 걸로 봐도 될까요?

 

양희은 : 그렇죠. ‘어때, 이거? 한번 들어봐’ 그럼 또 누가 그 옆에서 ‘가사가 아니, 여기까지만 썼는데, 가사 없어’ 그러고 (흥얼거리며) 흠흠흠~ 하고 부르면 누군가 또 가사를 써요. (웃음) 그래서 ‘이거 어때?’ 그러고 붙여 봐요. ‘아, 좋다.’ 그러면 노래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 분위기도 있었고. 

 

- 자기 얘기를 포크 곡으로 만들게 된 시작점이 청개구리의 무대였던 걸로 봐야겠군요.

 

양희은 : 그거보다 훨씬 전에 쎄시봉이 있었죠. 그렇게 본다면 저희 위에 송창식, 윤형주, 한대수, 조영남 이런 선배분들. 그리고 저 바로 위가 이제 김세환 선배라고 한다면 그분들의 시작은 쎄시봉이에요. 대학생들이 각자 악기를 하면서 화음을 맞춰서 부르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대수 씨가 대한민국 포크의 어떤 효시, 처음 시작으로 볼 수 있겠지요. 그분은 기타를 치면서 자기 얘기를 했어요. 자기 멜로디로 선율을 붙여서. 한창 이렇게 설렘이 많고 정서적으로 방황할 때 학교 선생님이 ‘너는 노래를 해 봐라. 니가 쓴 노랫말이 참 좋다’ 그렇게 격려를 해 주셨대요. 그래서 그걸 힘입어서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이런 노래들이 다 60년대 후반에 나온 거예요, 끝자락에. 

 

그 당시에 그러니까 명동이 주류라면 성균관대학교 앞에 통기타로 연주하는 아주 참 좋은 음악 살롱이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한대수 씨는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고 노래를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정확하게 따지자면 한대수 씨가 자작곡 포크곡의 시발점이에요. 

 

그분은 쎄시봉도 아시고. 그리고 쎄시봉에 가 보지 못한 친구들이 이제 청개구리에서 또 시작이 됐고. 쎄시봉이 없어지면서 선배들이 청개구리로 와서 합했고. 그런데도 그분들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기성 무대에 서기도 했고. 그게 70년에 한꺼번에 일어난 일 같아요. 

 

- 한 시대를 풍미한 아티스트들이 한 공간에서 다 만나게 된 거였군요.

 

양희은 : 그렇죠. 만나려고 만난 게 아니라 그 장소에서 다 서로 교차가 되는 거죠. 예를 들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버스에서 너~무 놀라운 청년을 본 거예요. 놀랍다는 건 뭐냐 하면, 대한민국 청년인데 머리를 이렇게 기른 사람을 처음 봤어요. 그런데 이렇게 옆을 보고 있는 그 옆얼굴을 나는 버스에서 등교하는 버스에서 봤는데 그 옆얼굴이 너~무 하얬고, 머리가 (가슴) 여기까지 길렀으며 제임스 딘처럼 청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장발 청년이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너무너무. 그러니까 그게 스틸 사진처럼 꽉 들어와 있을 거 아니에요.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한대수 씨더라고요. 그게 바로 그 성균관대학교 앞에 일하시던 장소 맞은편 버스 정거장이었어요, 그러니까 한대수 씨는 그때 저를 모르지만 제가 봤고요. 그때 이미 그분은 기타 치고 노래했고요. 김민기 씨는 70년에 만났으니까 벌써 2년의 차이가 있는 거죠.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양희은 인스타그램]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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