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 ‘아침이슬’ 비하인드 스토리 > 인터뷰 아카이브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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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by 우정호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 ‘아침이슬’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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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4-22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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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 말씀 주신 내용들로 되짚어볼 때, 데뷔 연도를 ‘청개구리’에서 활동 시절인 1970년으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양희은 : 방송을 탄 건 70년이죠. 그런데 데뷔 연도를 뭘로 꼽으세요? 음반 낸 게 데뷔인가요? 아니면 방송국에서 내 노래를 틀면 데뷔인가요? 그러나 가수가 자기 음반으로 얘기하는 거라면 저는 71년에 시작을 했죠. 그러나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그 이름을 처음 알린 것이라면 70년이죠. 기독교방송에서는 제가 데뷔하고 나서도 제가 부른 영어 노래가 한동안 틀어졌어요.

 

- 기독교방송에서 처음 곡을 취입했을 때 그에 대한 보수도 받으셨나요?

 

양희은 : 아니요. (웃음) 나는 방송하고 돈 받는다는 걸 몰랐어요. 나중에 ‘파우처’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그때 파우처를 모아서 갖고 가면 돈으로 받았거든요. 그런데 파우처는 담당 피디가 이렇게 갖고 있고 출연자를 만나면 주는 거죠. 그런데 저는 몰랐어요. 한참, 몇 년 지나서 알았어요. 그렇게 아둔했죠. 세상의 흐름을 몰랐죠. 정말 뭘 몰랐어요. 

 

- 당시엔 여러모로 시스템이 미비했던 것 같습니다.

 

양희은 : 네, 잘 몰랐고요. 당시 제 수입이라면 제가 아르바이트하는 오비스 캐빈. 그러니까 청개구리가 문을 닫고 저도 오디션에 붙어서 일을 시작하고, 거기서 처음 월급을 받기 시작했죠. 그 당시 너무 다급한 나머지 송창식 선배한테 부탁해서 이종환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그런 생맥주 살롱 ‘금수강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한 달 일하고, 그다음에는 제가 그리던 오비스 캐빈으로 오디션을 봐서 또 가게 됐죠. 디스코 붐이 일기 전까지 근 한 9년을 거기서 일했어요. 그곳이 저의 직장이었고, 또 방송국 라디오 생방송 DJ도 71년부터 했기 때문에 또 저의 방송국이 저의 일터였고, 그렇죠. 

 

- 그 당시에 음악은 주로 어떤 매체를 통해 들었나요?

 

양희은 : 저는 라디오에서 들었죠. 라디오 사랑은 진짜 뿌리가 깊어요. ABCD를 알면서부터 중학교 입학할 때 아버지가 사주신 트랜지스터 라디오, 그다음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사주신 포터블 전축. 그런 걸로 들었어요. 당시에는 원판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백판. 엉터리 복사판, 의정부나 미 8군 있는 그 근처에서 나오는 복사판 같은 걸 통해서 음악을 들었죠. 

 

- 라디오와 뿌리 깊은 인연이 있으셨군요.

 

양희은 : 라디오에서 많이 배웠죠. 60년대 후반, 뭐 70년대에 우리는 음악에 대한 모든 걸 다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그 유명한 이종환 선생님, 또 피세영 선생님, 최세영 선생님까지 세 분의 아주 막강한 라디오 DJ 라인업이 있었고요. 그다음에 미국의 소리방송에서 영어 노래 팝송을 틀어주던 여자분이 계셨어요. 그분도 유명하셔요. 당차게 하셨죠. 그분들이 소개하는 가수에 대한 정보와 노래에 대한 소개, 이런 것이 그냥 그대로 진짜 뭐 백지 도화지에 그림 드리듯이 흡수가 됐죠. 

 

- 당시 듣던 음악은 주로 팝송이었겠군요.

 

양희은 : 포크죠, 주로. 밥 딜런, 존 바에즈,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피터, 폴 앤 매리, 우디 거스리, 알로 거스리... 소위 미국 통기타 음악의 선구자들 노래를 들었죠.

 

- 당시 우리나라 주류 음악은 포크가 아니었나요?

 

양희은 : 트로트였죠. 통기타 음악의 시작은 주류가 아니었어요. 

 

- 통기타 음악이 한국에서 비주류였나요?

 

양희은 : 아유, 언제나 비주류죠. 통기타는 주류였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미국에서는 아마 가능했을지도 모르죠. 월남전이 한창일 때. 반전 운동의 기수로서 노래가 어떤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됐으니까요. 

 

- 보통 주류가 되고 싶어 음악을 할 것 같은데, 스스로 비주류 음악을 선택하셨던 거군요.

 

양희은 : 주류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주류가 되나요? (웃음) 그때 처음 팝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인데 중고등학생한테 뭐 트로트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죠. 뭔가 우리나라 게 아닌 것에 대한 선망이 있었잖아요. 그게 또 크죠. 영어 배워가면서 열심히 찾아 듣고. 어떤 영어 선생님 같은 경우는 팝송을 가지고 이렇게 풀어서 영어 수업 시간에 간단하게 가르쳐 주시기도 했으니까. 

 

- 그 당시 젋은이들만의 문화라고 볼 수 있겠네요.

 

양희은 : 그렇죠. 사대주의적인 문화죠. 남에 나라 게 더 멋있어 보이고. 그리고 또 음악이 젊은이들 가슴속으로 이렇게 ‘팍팍’ 왔어요, 노랫말도 모르면서. 뭔가 기타로 간단하게 하는 반주와 그런 것들이 신선하게 다가왔죠.

 

- 1971년 9월 첫 앨범 [아침 이슬]을 발표하셨습니다. 김민기 씨가 작곡한 이 곡의 어떤 면에 그토록 반하셨나요?

 

양희은 : 그걸 구체적으로 그렇게 분석을 한 적은 없지만... 하여튼 노래가 맨 끝부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 부분이 너무 좋았어요. 왠지 시원~했어요. 

 

- 당시 스스로의 삶과 관련해 와닿은 부분이 있었던 건가요?

 

양희은 : 글쎄, 삶이랄 게 있겠어요? 18살에 무슨... (웃음) 이제 졸업하고 뭐 대학입시 치르고 있었을 그런 때인데. 그런데 이제 우리 집이 그때 그... 하여튼 불이 나서 다 타버렸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이제 홀어머니 밑에 딸 셋이고 제가 장녀인데, 왠지 우리 집이 많이 힘겹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있었죠. 애들이 다 알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착잡하기도 하고 좀 한숨이 나기도 하고 그럴 때니까. 

 

- 대학교 시절 별명이 ‘라면과 회수권’이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양희은 : 네. 대학 다니면서. 눈만 마주치면 “야, 회수권 좀 줘” (웃음) “야, 라면 좀 사 줘라” 그래서 제 별명이 라면과 회수권이었어요. 애들이 달라면 다 줬어요, 그때는. 

 

- (웃음) 그래서 다 갚으셨나요?

 

양희은 : 안 갚았어요. (웃음) 그런데 걔네들하고 쭉 친하게 지냈으니까 뭐 갚았다면 갚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쨌든. 

 

- ‘아침이슬’을 1집에 싣게 된 과정도 알고 싶습니다.

 

양희은 : 그거는 김민기 씨가 하라고 그랬어요. ‘노래를 제법 하는 여자애가 하나 있다’고 소문이 나니까. 당시 오비스 캐빈이 얼마나 막강한 음반 자료를 갖고 있었냐 하면, 방송국 음악 담당 피디들이 거기 와서 음반을 빌려 갔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쇼쇼쇼>, <토토즐>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을 오비스 캐빈에서 다 섭외해 갔어요. 

 

오비스 캐빈, 그 한 곳에 오면 다 끝나요. 3층에는 신중현 선생님 밴드, 2층에는 통기타 가수들이 이렇게 있고, 또 공간의 반을 자르면 피아노 바가 있어서 이석 씨라고, 대한민국 이씨 왕족의 마지막 분이라는 이 분이나, 석찬 씨 같은 분들이 발라드를 피아노나 기차에 맞춰서 부르셨거든요.

 

그러니까 오비스 캐빈 2층에 발라드와 포크가 있고, 3층에는 록 밴드가 있고. 그다음에 2층에 또 ‘신지다방’이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는데 거기는 주로 미국 사람들만 있어서 우리가 들어가기에는 굉장히 객쩍었어요. 그런데 거기 있는 음반 자료가 막강했어요. 그러니까 방송국에 없는 자료들이 거기는 있었어요. 

 

이제 그러니까 음악 피디들이 오비스 캐빈을 많이 드나드는데 저를 좀 눈여겨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쟤 노래를 저렇게 흘려보낼 게 아니라 기록을 하는 게 어떻겠어?’ 해가지고 저를 레코드사에 소개를 해서 음반을 내게끔 하자고 했죠. 그런데 음반을 내려면 적어도 한 열 곡은 있어야 하는데 당시 제 레퍼토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제 김민기 씨한테 의논을 해서... 반주는 이용복 씨와 김민기 씨가 맡아서 두 분의 기타로 일사천리로 녹음이 진행됐죠. 우리 때는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녹음이죠. 진짜 잘 하다 끝에 가서 ‘삑’ 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되잖아요. 그 작업을 했죠. 그래서 음반이 나오게 된 거죠. 

 

- 아, 그 시절엔 모든 녹음이 원테이크였던 거군요.

 

양희은 : 원테이크예요, 우리는 모든 게. 저는 91년도에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원테이크로 했어요. 녹음을 이렇게 끊어 가면 맥이 끊기는 것 같아서... 노래의 흐름을 어떻게 그렇게 톡톡 끊어서 이어간다는 게 기술적인 면에서는 물론 다 가능한 얘기인데, 제 감수성이 허락하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 김민기 씨 곡을 부르게 된 비하인드도 알고 싶습니다. ‘그 곡 부르고 싶다’고 직접 김민기 씨에게 말씀하신 건가요?

 

양희은 : 많이 했죠, 그럼요. 뭐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아, 이거 참 부르고 싶은데” 그러면 “그럼 그래라” 뭐 이런 식이라서 시큰둥하니. (웃음) 저는 김민기 씨를 우상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너무 좋아서, 그 노래들이, 노랫말도 좋고. 선율도 좋고. 그런데 뭐 작업이 쭉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그때는 군부 독재 하에 여러 가지가 쉽지는 않아서 눈치 보면서 스스로 금하기도 하고 그랬죠.

 

- 1집과 2집에 김민기 씨 곡이 여러 곡 수록됐는데, 거의 금지곡이 됐겠군요.

 

양희은 : 그렇죠. 그리고 마지막에 김민기 씨랑 냈던 78년도 음반도 싸그리 금지가 됐죠. ‘늙은 군인의 노래’, 그다음에 요즘 여러분들 많이 하시는 ‘상록수’. 그게 다 그 음반에 있었죠. 제가 7년 반 만에 학교 졸업하고 그 기념으로 낸 음반이에요. 

 

- 어이없고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금지곡이 돼야 할 이유가 얼토당토않은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양희은 : 그런데 그때는 우리가 20대잖아요. 어이없다기보다 웃겼어요. ‘참, 웃겨’ 이런 생각. 그렇다고 대항은 못 하는 거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새기면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금지래, 금지’ 뭐 이제 이러면서. ‘늙은 군인의 노래’의 경우 국방부장관 명령에 의해서 ‘군인 사기 저하’라면서 전국에 있는 그 음반을 파기 시켜서 음반들이 막 쌓여있는 사진을 국방부장관 앞으로 올리기도 했어요. 그런 시절도 있었어요. 78년 9월. 

 

- 금지곡으로 정해지면 전혀 부를 수가 없었나요?

 

양희은 : 방송에서 못 틀었죠. 밖에서는 저는 부르고 다녔어요. 왜냐하면 내가 일하는 오비스 캐빈도 그렇고 손님이 왕인데요. 손님들이 청하면 불러요. 거긴 공영 방송이 아니잖아요, 라이브 무대에서는 저는 불렀어요. 

 

- 정부의 압박이 있진 않았나요?

 

양희은 : 뭐 잡아가지는 않지만 약간 좀 이상한 경험도 하죠. 뭐 하여튼 그런 거 있어요. 이상한 쪽지가 보내져 오고, 뭐 이렇게 옆에 따라붙고 뭐 이런 것이 있었지만 그건 대학교 축제 때 한해서고. 오비스 캐빈 같은 술집에서는... 글쎄. 오비스 캐빈이 워낙에 막강한 통기타 라이브 무대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적은 없어요. 대학교 축제에서는 좀 그렇게 묘한 일도 많이 있었죠. ‘양희은, 이 노래 부르지 마라’ 노래 제목 써 가지고 이상한 쪽지가 이렇게 와요. 

 

- 정보원들이 대학교 축제에도 다 깔려 있는 거군요.

 

양희은 : 네. 거기 다 깔려 있거든요. 다 있어요. 뭐 정보원들 있죠. 그 사람들 일인데요. 나는 나의 일을, 그분들은 그분들의 일을 하는 거고... 하지만 또 제가 눈치 봐서 뭐 못 하면 못 하는 거고. 

 

- 일종의 경고였군요.

 

양희은 : 방송국에도 쫙 깔려 있었어요. 방송국 큐시트를 검사해서 도장 찍는 게 그쪽 사람들이었는데요, 뭐. 

 

- ‘아침이슬’은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 곡이 됐습니다. 그 곡을 앨범을 통해 발표하실 때 어느 정도 의도를 가지고 하셨던 건 아닐까요?

 

양희은 : 미쳤어요? 아니, 열여덟, 열아홉 살짜리가 무슨 의도가 있어요? 의도 있었어요? 열여덟, 열아홉 살 때? 그렇죠? 그러니까 시선을 낮춰 줘야 돼요. 그렇잖아요. 무슨 의도가 있어요. 그냥 부른 거죠. 정서, 서정. 뭐 이런 거죠. 그것이 금지를 시킴으로서 어떻게 들불처럼 퍼져나갈지는 아무도 몰랐죠.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 언젠가 내가 SBS에서<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프로그램을 횟수로 꽤 했죠. 꽤 했어요. 주말 아침에 나가는 거. 이 프로그램이 시골에 가서 시골 할머니들한테 요리 비법을 배우는 거잖아요, 식당 같은 걸 소개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이제 설거지까지 다 하고 오게끔 하거든요.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 거름망하고 그다음에 정리 딱 해서 우리가 녹화하기 전의 상태로 어르신들 불편하지 않게 딱 해 놓고 철수하는 거죠.

 

그런데 한 사람이 남자가 계속 있는 거예요. “양희은 씨” 그래서 이렇게 쳐다봤더니 “아침이슬 금지시킨 사람이 나요”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요새 말로 재수없더라고. “그런 말을 왜 지금 나한테 하는 거예요?” 내가 그랬더니 자기가 금지시켰다고. 아유, 정말 말 상대하기도 싫어, 섞기도 싫고. 괜히 화가 나는 거 있죠, 부화가. “그래서 잘못하셨죠. 그 덕에 훨씬 더 많이 퍼져나갔죠. 멍충이였어요” 내가 그 사람한테 그랬어요. (웃음) 

 

그 사람이 뻥인지 뭐 잘난 척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낙향해서 시골에서 그냥 시골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있더라고요. 나는 그 사람이 진짜 그랬다고 생각 안 해. (웃음) 옆에 있었거나 뭐 그랬겠지. 만약에 그런 일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자기네들도 뭔지 몰랐을 거예요. 어쨌든 노래를 오히려 풀어 놨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금지곡으로 묶었기 때문에... 아, 대학 들어가서 뭐 통기타 동아리에서 어떤 노래를 배우겠어요. ‘이거 금지곡이야’ 이러면서 배우죠. 그렇게 해서 퍼져나가게 됐겠죠. 

 

- 금지곡 사유들이 참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양희은 씨 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그렇고요.

 

양희은 : 사랑이 왜 이루어질 수 없느냐고 밑줄 쫙 쳐갖고. 시뻘건 매직으로. 매직도 없었어, 그 당시 이상한 색연필로. 그렇게 해서 사랑이 왜 이루어질 수 없느냐면서 ‘가사 퇴폐’ 뭐 이렇게 금지시켰죠. 

 

- 이해가 가질 않네요.

 

양희은 : 지네 마음대로죠.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여러 가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이었는지 그분들은 몰랐을 거예요. 뭘 알고 했겠어요? 뭐 신종현 선생님 노래, 이미자 선생님 노래 얼마나 금지곡이 많아요. 다 마찬가지예요. 

 

- 아침이슬이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크가 주류로 갈 수는 없었나요?

 

양희은 : (웃음) 아니요. 포크는 그저 고등학생, 대학생 그 언저리에서 머물렀죠. 

 

 

 

(3부에서 계속.)

 

 

[사진출처=서라벌레코드]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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