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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7
by 최승원

조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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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07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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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팝 발라드가 인기를 얻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등장했던 많은 뮤지션 중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조정현. 영화배우 같은 외모와 감성적인 음색으로 많은 팬을 매료시켰고, 짦은 가수 활동이었음에도 ‘감성적인 발라더’이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가수로서 시련도 있었지만, 그의 음악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빼어난 가창력의 팝 발라더 등장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

1964년 서울 출생인 조정현은 고등학생 시절 아이스하키 선수 생활을 했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 했다. 1988년, 당시 메이저 음반사였던 신세계 레코드는 조정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가수 데뷔를 기획했고,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원했던 신세계 레코드는 신인 작곡가 신재홍에게 조정현의 데뷔 앨범 곡 작업을 요청했다. 

 

조정현은 1989년 데뷔 앨범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작곡가 신재홍과 더불어 이호준, 싱어송라이터 윤상이 참여했다. 특히, 서정적인 멜로디와 아련한 가사, 본격적인 팝 발라드의 형태를 갖춘 타이틀곡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와 또 다른 히트곡 ‘슬픈 바다’를 작곡한 신재홍은 이후 임재범의 ‘너를 위해’, 박효신의 좋은 사람‘과 같은 곡을 내놓은 팝 발라드 작곡의 귀재이다. 당시 대중들이 세련된 팝 음악을 동경하는 추세였고, 팝 발라드가 가요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터라, 조정현의 데뷔 앨범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2022년, 조정현이 KBS <백투더뮤직>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는 다른 가수가 부를 뻔했지만, 작곡가 신재홍이 “그쪽에서 안 할 것 같으니, 연습을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신인이었던 조정현은 이미 데뷔한 다른 가수가 부르기로 했던 곡을 자신이 부르기가 부담스러워 고민했지만, 당시 같은 신인 작곡가인 신재홍의 권유로 이 곡을 연습하게 됐다. 함께 약 2년여간을 매일 같이 8시간 동안 연습하며 준비했다.

레코드사 소속이었던 탓에, 별다른 매니지먼트 없이 앨범만 발매했던 조정현은 자신의 앨범을 홍보할 방법을 찾다가, 나이트클럽 DJ를 하는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하며 직접 앨범을 홍보했다. 이후 1990년 2월 전국 DJ 연합회 신청곡 집계에서 1위를 기록했고, 라디오 신청곡 역시 늘어나면서 그의 노래가 알려졌다. 방송 효과로 인지도가 늘어나자, 레코드 숍을 중심으로 앨범 판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9년 <쇼 특급 새별들의 행진>에서 첫 방송 무대를 가진 조정현은 이날 이후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공식적으로 80만 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음반 판매량 집계로 순위를 정한 ‘뮤직박스 차트’에서,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 OST 타이틀 곡과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는 KBS <가요톱 10>에서 3주 연속 1위, MBC <쇼네트워크> 1위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 KBS 파업으로 인해 5주간의 공백 탓에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은 타지 못했다. 당시 가수들은 KBS 파업에 따른 대응책으로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조정현 역시 콘서트를 열어 활동을 이어갔다. 타이틀곡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의 맹렬한 성공 이후 후속곡 ‘슬픈 바다’까지 연이은 히트를 기록했으며, 특히 “한국의 장국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많은 여성 팬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외모와 더불어 빼어난 라이브 실력까지 겸비했기에 안정감 있는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았다.

 


 

순탄치 않은 시간들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조정현은 1집 이후, 소속사와의 문제로 인해 긴 소송에 들어갔다. 소송 과정에서 조정현은 히트곡인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를 더 이상 부르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심적 괴로움에 시달렸다. 대신 방송 MC로 활동을 이어갔다. 소송이 마무리된 뒤 전 소속사의 횡포로 인해, 다른 제작사와 스튜디오에서 앨범 제작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발견하여 조정현은 자신이 연습하고 있던 곡을 자비로 녹음했다. 그러나 결국 2집 앨범을 녹음만 해놓고 발매할 수 없어, 활동할 수 없게 되자 1993년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조정현과 전 소속사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2집 앨범 [비애 / 지금 내모습]을 발매했다. 수록곡 ‘비애’는 가요 프로그램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94년, 조정현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3집 앨범 [조정현3]을 발매했다. 3집에는 ‘날개 없는 꿈’, ‘꿈이 아니길’과 같은 서정적인 팝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당시 전 소속사와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힘을 보탰던 친구와 이별하게 되면서, 3집 앨범을 발매하고, 별다른 방송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짧은 가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활동을 멈춘 조정현은 압구정동에 작은 카페를 개업하면서 개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남아있던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1995년, 가수가 아닌 신인가수의 매니저로 가요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거대 기획사를 상대로 경쟁하기에는 녹록지 않았던 탓에 매니지먼트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96년 고교 시절 아이스하키 선수 경험으로 인해 MBC 드라마 <아이싱>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 복귀는 하지 않았다. 조정현은 매니지먼트 사업을 접고, 무역업을 시작했으나 IMF로 인해 부도를 피할 수 없었다. 사업 실패 후 조정현의 둘째 형이 자신이 하던 레스토랑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고, 호프집 사업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음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조정현은 잘되던 사업과는 별개로 미사리 카페촌에서 라이브를 하며, 가수 활동을 이어갔다. 그즈음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접고 새 음반 발매를 결정했고, 서울에서 한정식집과 커피전문점을 열어 비용을 마련했다. 

 

오랜 공백을 깨고, 2001년 전성기 시절 함께 활동하며 절친했던 가수 김민우, 박정운, 박준하와 함께 콘서트를 열어 관객들 앞에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2003년 프로듀서 김창환과 함께 4집 앨범 [세상에서]를 발매한다. 수록곡 ‘그대에게 쓰는 편지’, ‘세상에서’ 등 조정현의 전매특허인 팝 발라드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곡뿐 아니라 알앤비, 라틴,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였다. 또한 그의 히트곡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 ‘슬픈 바다’ 등을 리메이크해 수록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인생에서 또 다른 고비가 찾아왔다. 2000년, 대마관리법 위반 혐의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3집 음반 실패 후의 좌절감으로 인해 대마초 흡연에 빠져든 것으로 조사됐는데, 2005년, 가수 박준하와 또다시 대마초 흡연으로 인해 다시 처벌받았다. 
 

 

여전히 진행 중인 조정현의 음악
 

조정현의 음악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는 2000년대 가수 조성모와 성시경이 리메이크하는 등 꾸준히 사랑받는 곡으로 남았다. 그야말로 ‘원 히트 원더’라고 할 수 있었던 이 곡은 조정현을 대표하게 됐다. 2010년대 이후부터 조금씩 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던 조정현은 최근 보여준 그의 라이브에서는 현역 못지않은 가창력과 음색이 여전했는데, 꾸준한 연습과 자기 관리가 있었음을 직접 밝혔다. 조정현은 그의 거점을 강원도 원주로 옮겼고, 2023년 강원도 원주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JH 엔터테인먼트를 설립 후 버스킹 공연과 후배양성에 힘쓰고 있다. 

 

[사진 출처= KBS, 진옥션, maniadb, BRAVO my life, 원주시]

 

 

최승원 아카이브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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