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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by 최승우

이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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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9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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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뉘앙스가 미묘하다. 십대 시절부터 내몰려야 하는 이 땅의 청춘들을 떠올려보면 더 그렇다. 뭔가를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일 믿고 싶지만 정작 한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나이.

 

스무 살이라는 지점은 빠르든 늦든 누구에게나 온다. 그것을 딱 스무 살에 겪을 수도 있고, 열다섯 살이나 서른 살에 겪을 수도 있지만, 누구든 그런 지점을 한 번은 지난다. 2004년 이장혁의 ‘스무 살’이 20년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꽂히는 이유도, 2004년생들까지 한숨을 푹푹 넣어가며 듣게 되는 이유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상실, 혼란, 그리고 영등포의 기억

 

이장혁의 어릴 적 꿈은 야구선수와 만화가였다. 틈만 나면 캐치볼을 하고 만화를 그렸다. 특히 그림은 사생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그런 그를 음악으로 이끈 것은 사춘기 때 겪은 커다란 상실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일은 예민한 시절에 지워지지 않을 생채기를 안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사를 하면서 집에 오디오가 생겼다. 그가 처음으로 산 음반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었고, 그때부터 음악에 빠져들었다. 주로 친구들의 음반을 빌려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정서적 결이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장혁은 시인과 촌장, 어떤날, 들국화 등을 귀에 달고 살았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톰 웨이츠(Tom Waits)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3 때는 어머니를 졸라 싸구려 클래식 기타를 사서 연습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해야겠다는 확실한 목표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친구들과 밴드도 만들었고 공연하는 재미도 깨달았지만, 그보다는 문예반 활동에 더 열정적이었다. 이장혁은 “글쓰기보다는 술 먹고 노는 걸 더 많이 한 모임”이라고 말했지만, 그 시절 매일 시 쓰고 토론하면서 단어를 압축하고 리듬을 만드는 법을 익혔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가사를 쓰는데 중요한 토양이 되었다.

 

‘스무 살’이라는 노래에서 엿보이듯,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혼란과 방황은 이어졌다. 점점 세상의 질서에 편입돼 가는 문예반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청소부터 건설 현장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월급 받으면 아무 곳에나 가서 영화를 보고, CD를 사서 들으며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그러다 배고프면 햄버거 하나 사서 꾸역꾸역 밀어넣고, 또다시 정처없이 헤매기를 되풀이했다.

 

아르바이트 중 영등포역에서 야간 청소를 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롯데백화점과 타임스퀘어가 들어서면서 몰라보게 매끈해졌지만, 이장혁이 스무 살이었던 1991년 영등포역 일대는 지저분한 골목에 노숙자가 넘치고, 자칫 길을 잘못 들면 줄지어 있는 홍등가로 들어서게 되는, 어둠의 에너지가 가득한 곳이었다.

 

“알에서 깨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아, 이게 세상이구나’ 싶었다. 길바닥에 누워 자다가 그대로 바지에 오줌 싸는 노숙자, 인신매매범, 마약쟁이, 앵벌이…. 소매치기는 흔했다. 가출해서 앵벌이 하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설득하고 때리기까지 하면서 몇 명 집에 들여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다시 본드 냄새 풍기면서 돌아왔다. 그걸 보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다들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영등포에 대한 이장혁의 덤덤한 회상이다. 그는 지금도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버스라도 타고 영등포를 지날 때면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정신이 혼미해진다고 고백했다. 이런 기억은 1집 수록곡 ‘영등포’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누구도 올 수 없는 사막의 왕

 

이장혁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6년이다. 그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고등학교 때 밴드를 같이 했던 후배가 그의 곡을 듣고 밴드 결성을 제의했다. 그렇게 해서 이장혁(기타, 보컬), 이상훈(베이스), 김영식(드럼)으로 이루어진 아무밴드가 만들어졌다.

 

홍대 앞의 클럽 ‘재머스’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던 아무밴드의 공식 데뷔 기회는 이듬해인 1997년 찾아왔다. 1997년 재머스 컴필레이션 [Rock 닭의 울음소리]에 ‘판토마임’을 수록하게 된 것이다. 이장혁, 그리고 아무밴드의 첫 레코딩이었다.

 

그 다음 해인 1998년에는 첫 정규 앨범 [이판을사]를 발표했다. “그때는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알지도 못했다”는 이장혁이 말처럼, 기술적으로 특별히 뛰어나거나 팀워크의 완성도가 높은 앨범은 아니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크라잉넛이나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처럼 인디를 뛰어넘는 관심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서정적이며, 거칠게 뿜어내는 절망과 우울의 아우라는 마찬가지로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던 소수의 청년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중 ‘사막의 왕’은 아무밴드의 대표곡이자, 이장혁이 노래하는 세계의 원형과 같은 노래다.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올 수 없는 나만의 사막이 있다’는 이 곡의 모티브는 그의 음악에 계속 나타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진정한 의미로 좁혀질 수 없으며, 우리는 결국 모두 하나하나가 고립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장혁은 아무밴드 1집에 대해 “사이키델릭과 펑크, 포크를 묶고 싶었는데 실패했다”고 자평하며, “2집은 알이엠(R.E.M)이나 카운팅 크로우스(Counting Crows) 같은 스타일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1집은 아무밴드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해체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심이 되어줘야 할 드럼이 몇 번이나 바뀌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컸다”는 이장혁의 이야기로 멤버 문제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아무밴드 시절에 대해 “여러 일이 있었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특별히 좋았다거나 나빴다는 기억은 없다”고 돌아봤다.

 

“표현 욕구를 억누르면 죄책감을 느낀다”

 

이장혁은 아무밴드 해체 후 잠시 동안 공백을 가졌다. 그는 나중에 “몇 번 앨범 제안을 받았지만,준비가 덜 되어 있어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건강 문제도 있었다. 급성 간염에 걸리는 바람에 음색이 완전히 바뀌었고, 한동안 소리를 찾느라 고생했다. 기존에 만들어놓은 곡도 목소리에 맞게 다시 세팅하는 과정을 거쳤다.

 

2002년 이장혁은 어쿠스틱 기타 한 대를 둘러메고, 이화여대 후문 근처의 라이브클럽 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데모를 만들어 올리며 솔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인디 레이블 지원 사업으로 만들어진 첫 정규 앨범 [이장혁 Vol. 1]은 2004년에 나왔다. 이장혁은 이 앨범에서 아무밴드 때 부족했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의욕을 한껏 드러냈다. 그는 “아무밴드 때는 앨범의 색깔이 일정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욕심 때문에 통일성이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1집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누수’, ‘스무 살’, ‘자폐’, ‘성에’, ‘꿈을 꿔’ 등 흡사 영혼 그 자체를 내던지는 듯 토해낸 노래들은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았다.

 

그중 ‘스무 살’은 이장혁의 노래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이며, 본인이 좋든 싫든 앞으로도 그와 떨어지는 게 불가능한 대표곡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이 노래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위태로움, 허망함, 상처 등 누구든 한 번은 지나쳤을 청춘의 지점이 처절하리만치 솔직하게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지니면서, 성장이라는 터널을 힘겹게 지나는 청춘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이장혁도 “매우 개인적인 노래인데 지금도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며 “이 노래를 만들 때 이대로 세상에 나가도 좋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계속 자문했는데, 결국 자연스럽게 놔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표현의 욕구를 억누르면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나중에 후회할 것인가,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이장혁은 꽤나 과작(寡作) 뮤지션이다. 그는 공연 도중 “4년에 앨범 한 ‘장씩 낸다고, 사람들이 무슨 월드컵이냐고 하더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그 말대로 두 번째 솔로 앨범 [이장혁 Vol. 2]는 새해를 코앞에 둔 2008년 겨울이 되어서야 나왔다. 3집 [이장혁 Vol. 3]는 거기서 또 6년의 세월을 보내고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사정상 작업이 늦어진 탓도 있지만, ‘자연스러움’을 자신의 색깔로 여기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이장혁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준은, 나중에 후회할 것인가의 여부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하기 싫고 할 수도 없는 것은 굳이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는 3집 발매가 늦어졌을 때 “중간에 멈춰서 수정하지 않고 냈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고 했다.

 

2집에서 이장혁은 전작에 비해 좀 더 단순한 접근법을 택했다. 풀 밴드 편성에 하몬드 오르간, 가야금, 친동생 이정훈(밴드 한음파의 리더)이 연주한 몽골 악기 얼후(二胡)까지 양껏 집어넣은 1집에 비해 2집은 훨씬 간결해졌다. 이 때문에 ‘봄’, ‘거짓말’, ‘청춘’, ‘얼음강’ 등 그의 일관된 정서가 깔린 노래들은 더 내밀해지고 깊어졌다. ‘얼음강’은 2015년 EBS 스페이스 공감이 기획한 특집에서 소설가와 문학평론가들이 선정한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이장혁의 소속사인 루비살롱(지금의 루비레코드)에서는 국카스텐, 검정치마,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이 이장혁 2집을 전후해 데뷔 앨범을 냈다. 그 외에도 2008년은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등 거물 신인의 등장으로 인디 신이 활기를 띠었던 해다. 이장혁도 이런 흐름을 타고 공중파 방송에 몇 차례 출연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다. 그가 매체에 가장 많이 노출됐던 시기다.

 

믹싱과 마스터링에 투자를 많이 했다는 3집은 이장혁의 앨범 중 가장 매끄러운 균질의 사운드를 지닌 작품이다. 형식적으로는 전형적인 밴드 사운드였던 1집, 포크에 가까웠던 2집의 중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장혁 본인도 3집이 제일 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밝혔다.

 

‘에스키모’, ‘칼집’, ‘불면’, ‘빈 집’ 등 비관과 절망을 노래하는 정서는 3집에서도 그대로지만, 때로 아름다울 만큼 처연하고 담담한 체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이장혁은 “분노가 슬픔이 됐다”고 표현했다. 그가 청량리역에서 한 노인을 보고 만들었다는 ‘노인’은 다른 여러 동료 뮤지션이 좋아한다고 밝힌 곡이기도 하다.

 

이후 이장혁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은 그가 좋아하는 시인과 촌장, 들국화의 커버 버전이 담긴 2017년 EP [비둘기에게]다. 그는 편집 디자이너와 스튜디오 음악감독 등 생계를 위한 일을 병행하며, 지금도 매달 클럽 빵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세상은 고통이고, 나는 희망을 노래한 적이 없다”

 

어떤 아티스트가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테마가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풀리지 않는 화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장혁처럼 일관된 이야기를 해온 뮤지션도 드물다.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그는 늘 명확하고 간결하다.

 

“세상은 고통이다. 나는 인간을 좋게 보려는 시도는 모두 허망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의 작은 행복이나 긍정적인 변화들은 당연히 존재하지만, 크게 보면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게 삶이다.”

 

이장혁은 예전에 방송에서 “나는 희망을 노래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음악과는 다르게, 이장혁은 사석에서 퍽 밝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웃고 가겠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집의 인트로에 해당하는 ‘백치들’은 그가 삶과 세상을 보는 시선을 명확하고도 쓰라리게 담아낸다. ‘이 세상은 어차피 없어질 풍경이니 아파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것.

 

그럼에도 이장혁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들은, 절망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다지는 결의 같은 건지도 모른다. 세상은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고, 살아 있는 한 힘껏 헤매어보자는. 그렇기에 누군가는 역설적으로 희망 하나 없는 그의 노래에서 위안을 얻는다.

 

[사진출처=사운드네트워크, 지니뮤직]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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